제12화 장 어멈 가족의 고발
효진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금 5천 냥.”
전생에도 이러했다. 폐하께서 황금 5천 냥을 하사하신다는 내용이 황방에 붙어있었다. 정확한 단서만 제공한다면 황금 5천 냥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초여드레 그날까지 그 누구도 황금 5천 냥을 가져가지 못했고 결국 광희 세자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효진은 이 사실을 평강 공주께 아뢰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이나 망설였다.
만약 아뢰지 않는다면 전생에서처럼 광희 세자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평강 공주도 정신을 놓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사실대로 아뢴다고 해도 평강 공주가 그녀의 말을 믿을 수나 있을까? 설령 믿는다고 해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시 말해 어찌 됐든 그녀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생기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심란하고 뒤숭숭하던 그때 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해월아, 잠시 밖에 좀 다녀와야겠다.”
그러자 해월이 물었다.
“아씨, 또 배가 고프시옵니까?”
평소에도 두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찾으러 밖에 나가곤 하였다. 저택에서 야채 반찬만 먹자니 배가 부르지 않아 가끔은 밖에서 먹기도 하였다.
“그래!”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았던 효진은 검둥이를 안고 나가버렸다.
국공 저택을 나선 두 사람은 한 품위가 있는 주막으로 들어가 앉았다.
평소 효진은 이런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다가 대충 배를 채우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주막에는 고상한 척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일반 백성들도 눈에 띄었는데 보통 주막 밖의 작은 마당에 앉아 흔한 술을 마셨다.
용 태후께서 수렴청정한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오랑캐를 쫓아내고 변방이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민족 풍습을 개방하고 문학을 제창하였더니 시가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작은 주막에도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문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오늘도 주막은 사람들로 북적이었다.
다들 저마다 광희 세자가 실종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효진의 옆상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몇몇 명문가 자제들과 신분에 걸맞게 고귀하게 치장을 한 두 아씨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진지한 표정의 머슴과 계집종이 서있었다.
그들은 남의 시선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고담준론을 펼쳤다. 그러다가 가끔 큰소리로 웃는가 하면 힘껏 손뼉을 치기도 하였다.
“평강 공주네 부부가 평소에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으니 이 같은 변을 당한 게 아니겠소? 그렇게나 많은 관원들을 잡아넣었는데 그중에 억울한 이가 설마 한두 명도 없겠소? 그 대가를 치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대가가 저들의 아들한테로 향했으니 정말 안타깝게 됐소. 듣건대 황태후 마마께서 광희 세자 저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다고 하오.”
“그러게나 말이오. 정말 예뻐하셨소. 공주가 그렇게나 많은데도 황태후 마마께서는 왜 유독 평강 공주만 특별히 더 예뻐하셨는지 그 이유를 참 모르겠소. 평강 공주는 황실의 핏줄도 아니지 않소?”
그러자 한 여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황태후 마마도 출신이 고귀한 건 아니오.”
“옳소. 듣건대 예전에 황태후 마마께서는 선황과 함께 순장하기 위하여 입궁했다고 하오. 그런데 선황이 먼저 유지(遗旨)를 내리면서 목숨을 부지했고 게다가 점점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소.”
다른 한 아씨가 매몰찬 목소리로 말했다.
“평강 공주와 한 대감께서 이번 교훈을 받아들여서 더는 이것저것 들춰내지 않았으면 좋겠소. 아버지가 그러는데 얼마 전에 한 대감이 아버지도 알아봤다고 하오. 그렇게 설치고 다니니까 경중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지 않소.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청렴하신 분이신지 다들 알고 있지 않소?”
“그러게나 말이오.”
한 사람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난 차라리 광희 세자 저하가 비참하게 죽었으면 좋겠소.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교훈이 아니지 않소.”
얘기를 마친 그 사람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른 효진은 술잔을 꽉 쥐었다.
감찰아문에서 오판하여 누군가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지는 모르겠지만 학식과 교양이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 네다섯 살 아이가 봉변을 당하여 흉악한 자의 손에 처참하게 죽길 바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대체 어느 정도로 악한 사람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마음의 안정을 취하려고 나왔다가 오히려 화만 잔뜩 치밀어 올랐다.
“그만 가야겠다!”
효진이 술잔을 내려놓고 해월이에게 말하자 해월은 외마디 대답과 함께 효진을 따라나섰다.
마당에서 술을 즐기고 있던 일반 백성들도 이 일을 토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투와 태도는 명문가 제자들과 완전히 달랐다.
효진은 곁으로 다가가 누군가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내가 누가 세자 저하를 납치해갔는지 알게 된다면 반드시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자 저하를 구해올 것이오.”
“한 대감님은 모처럼 보기 드문 좋은 관원이란 말이오!”
“평강 공주께서 정신을 놓고 있다고 들었소. 너무 안 됐소.”
“평강 공주께서 어렵게 얻은 세자 저하인데 어찌 괴롭지 않겠소. 만약 우리 집 아들내미가 저런 일을 당했다면 나도... 어휴, 그만 마시고 돌아다니면서 무슨 단서라도 있는지 찾아보는 게 어떻겠소?”
효진은 주막을 나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원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백성들의 평가를 들으면 알게 된다.
평강 공주와 한 대감은 관료와 명문가들의 미움을 샀지만 백성들은 그들을 한없이 존경하며 우러러 모셨다.
‘효진아 봉효진, 전생에 넌 한문석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양심마저도 함께 죽은 거야? 아들을 잃은 아픔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한 어미가 네가 받았던 고통을 그대로 받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볼 셈이야?’
“해월아, 공주 저택으로 가야겠다.”
효진은 갑자기 결심이라도 한 듯 뒤돌아서 해월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해월은 의혹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아씨, 공주 저택은 어인 일로 가시려는 것이옵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넌 그저 따라오면 되니라.”
효진이 그대로 가버리자 해월은 잠깐 멍해 있더니 이내 그녀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큰 길을 벗어나자마자 두 관차(官差:관에서 파견하는 관리)가 효진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혹시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 되옵니까?”
한 관차가 효진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그러자 효진은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중 한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는데 경조 저택 관아의 양씨 포도대장이었다.
“그렇다!”
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란 말이냐?”
양씨 포도 대장이 말했다.
“셋째 아씨, 저희와 함께 관아로 가주셔야겠사옵니다. 아씨가 사람을 죽였다고 장연경의 가족들이 아씨를 고발하였사옵니다.”
장연경, 장 어멈의 이름이다.
깜짝 놀라 얼굴이 사색이 된 해월이 다급히 설명하였다.
“먼저 독을 쓴 건 장 어멈이옵니다. 저희 아씨는 절대로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분이 아니옵니다. 그리고 장 어멈은 개한테 물려서 죽은 것이지 저희 아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사옵니다.”
“셋째 아씨께서 양해해 주셔요. 장연경의 가족이 관아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니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조사를 진행해야 하옵니다. 하지만 셋째 아씨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만약 진정 장연경이 먼저 독을 써서 주인을 해하려 했다면 나으리께서 반드시 셋째 아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옵니다.”
사실 효진은 관아로 가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안 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럼 내일 가도 되겠느냐? 오늘은 내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그러느니라.”
“셋째 아씨, 그냥 저희와 함께 한 번 가시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얼마 걸리진 않을 것이옵니다.”
포도 대장은 멀지 않은 곳에 멈춰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셋째 아씨, 걱정 마셔요. 그 사건에 대해 몇 가지만 여쭤본 후 바로 마차로 저택까지 모셔다드리겠사옵니다. 절대로 아씨의 다른 일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대로 고개를 돌려보자 확실히 마차가 밖에 멈춰 서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장 어멈의 가족들이 관아에 고발했다고 하면 관아의 사람들은 마땅히 저택으로 가서 날 찾아야 하는데 왜 길 가운데서 막아서는 거지?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안 걸까?’
경조 저택의 장 대감은 감찰아문의 한 대감이 직접 뽑은 사람이었다. 여러 사건을 조사하면서 한 번도 인정에 구애됨이 없이 공정하게 처리했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마침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 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해월아, 넌 감찰아문에 가서 아버지께 내가 경조 저택 관아로 갔다고 아뢰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효진은 그래도 아버지를 찾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장 어멈이 독을 쓴 일을 아버지가 전에 조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해월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소인 바로 다녀오겠사옵니다.”
해월이 떠나자 효진은 양씨 포도대장한테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아로 가면 되겠느냐?”
“셋째 아씨, 이쪽으로 가시면 되옵니다.”
고씨 포도 대장은 예를 갖춰 말했다. 하지만 효진이 살짝 망설이자 또 이렇게 말했다.
“셋째 아씨, 걱정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비록 황태후 마마께서 함부로 곤장을 들어 노비를 죽일 수 없다고 명을 내리셨지만 노비가 주인을 해하려 했다면 주인은 그 노비를 죽여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사옵니다. 장연경의 가족이 아씨를 고발하는 바람에 나으리께서도 어쩔 수 없이 셋째 아씨를 모셔오라고 한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저 형식일 뿐이니 정확히 조사를 하고 나면 앞으로 셋째 아씨에 대한 명성도 좋아지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효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둥이를 품에 안았다.
“알겠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