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집으로 찾아왔다
대청마루 복도 앞에 서 있던 봉효진의 귀에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마님, 마님께서는 예슬의 고모님이신데, 신경 좀 써주시면 감사하겠사옵니다. 어머니의 뜻은 아버지가 조정으로 복귀하기 전에 예슬과 문석의 혼사를 치르라는 것이옵니다.”
말은 꺼낸 사람은 한문석의 누님, 즉 봉 시랑의 부인인 한교영이였다. 봉효진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선우 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봉 마님, 과분한 말씀이지요. 예슬이가 제후 저택에 시집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운이 따라줬기 때문입니다. 이 혼사를 꼭 성사시키도록 하지요.”
봉효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한 그녀는 모두가 그녀를 위해서 그런 줄 알았고, 현명한 여성은 당연히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줄 알았다.
봉효진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시선은 한문석의 얼굴에 닿았고, 기억 속의 그 흉악한 얼굴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무릎 꿇고 절을 하며 몇 번이고 애원하는 자신의 모습이며,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임씨 댁 어르신의 냉혹한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아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봉효진을 바라보는 한문석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그는 봉효진을 딱 두 번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항상 빨간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옷차림을 하고 금빛 머리 장식을 두른 채 얼굴은 마치 조색판처럼 얼룩덜룩해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오늘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의외로 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효진아, 마침 잘 왔다!”
고급스러운 꽃과 줄기 무늬가 수 놓인 비단옷을 입은 선우 댁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봉효진의 시선은 한문석의 얼굴에서 선우예슬의 얼굴로 옮겨갔다.
희고 매끄러운 그녀의 얼굴은 수줍은 듯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은 빨갛게 물든 채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속눈썹은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하얀 망사 치마의 소맷부리에는 우아한 녹색 대나무 잎이 수 놓여 있었고, 그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우면서 자극적이었다.
봉효진을 발견한 그녀는 눈빛이 재빨리 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울음기가 다시 짙어졌다. 어깨가 이따금 떨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울음이라도 터뜨리는 듯싶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한문석은 슬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선우예슬의 미간은 활짝 펴지면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봉효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주 주위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개같은 연놈이 납셨네...’
한교영은 봉효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효진아, 우리가 오늘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아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네 어머니께서 너는 원래 너그럽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했단다. 너와 예슬이는 또 사촌 자매가 아니더냐. 자매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예슬을 받아들이는 거, 맞지?”
봉효진은 세 사람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다.
한교영은 오늘 금색과 은색의 꽃무늬가 수 놓인 붉은색 주름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비취로 된 장신구를 잔뜩 하고 있었으며, 그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봉효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무슨 일이옵니까? 저는 아직 잘 모르겠사옵니다.”
선우 댁은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효진아, 너 그렇게 철이 없으면 되겠느냐? 예슬은 이미 문석의 아이를 뱄으니 반드시 집 안으로 들여야 한다.”
봉효진은 짧은 대답과 함께 선우예슬을 바라보았다.
“사실이냐?”
선우예슬은 수줍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언니, 죄송하옵니다. 저... 저희는 단지 한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이옵니다.”
“한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했느냐? 그건 혼전에 순결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야. 따지고 보면 연못에 빠져 죽어도 모자랄 판이지.”
봉효진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선우 댁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슬과 문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사랑해왔으며, 네가 중간에서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미 혼인을 올렸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봉효진은 한문석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왜 나한테도 혼사를 논한 것이오? 결국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찰나의 쾌락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소?”
한문석은 화를 버럭 냈다.
“무슨 허튼소리냐!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여자가 이토록 상스러운 말을 내뱉다니,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봉효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뻔뻔하다고? 적어도 나는 다른 남자와 사통하여 임신하거나 윤리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 경중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청주(青州)에서는 이런 남녀를 개 같은 연놈이라고 하지!”
선우 댁은 깜짝 놀랐다.
“효진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어찌하여 이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이냐. 너는 국공 저택의 셋째 아씨란다. 매사에 신중해야 하는 거 모르냐?”
봉효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선우 댁을 쏘아봤다.
“벌써 듣기 거북하면 어떻게 하시옵니까? 아직 그녀를 상스러운 년이라고 하지도 않았사옵니다.”
선우예슬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라 빨갛게 물들었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저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상 저도 더는 살고 싶지 않으니 당장 언니 눈앞에서 죽겠사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기둥을 박으려고 몸을 움직였고, 이에 식겁한 한문석은 얼른 그녀를 끌어당겼다.
“예슬아, 아니 된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말아라. 내 너와 반드시 혼인을 치를 것이다.”
“문석 오라버니, 아니옵니다. 그냥 제가 죽게 놓아주십시오.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없으니 우리 아이와 함께 목숨을 거둘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선우예슬은 애처롭게 울음을 터뜨렸다.
선우 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봉효진을 향해 외쳤다.
“대체 예슬이한테 무슨 막말을 하는 것이냐? 얼른 사과하지 못하느냐?”
봉효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그녀한테 사과하라니, 어이가 없사옵니다. 지금 제가 혼전 임신을 했사옵니까? 아니면 뻔뻔스럽게 다른 남자와 간통을 했사옵니까? 왜 제가 사과를 해야 하옵니까? 제가 사과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까?”
그녀는 벌떡 일어서 선우예슬 앞에 다가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말했다.
“죽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얼른 죽어버려!”
선우예슬은 울면서 말했다.
“문석 오라버니. 이거 놓아주십시오. 놓아주십시오...”
“봉효진, 너...”
극노한 한문석은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
봉효진은 그의 손목을 잡고 뒤로 확 밀어버리자 한문석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황급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서야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었다.
곧이어 봉효진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차가운 목소리로 선우예슬을 향해 말했다.
“이제 너를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얼른 죽어버려!”
선우예슬은 넋이 나간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느냐!”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봉효진의 외침에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효진 언니, 저한테 왜 이러는 것이옵니까? 제가 잘못을 했으면 저를 꾸짖거나 손찌검을 하면 되지 않으시옵니까? 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것이옵니까!”
선우예슬은 울면서 말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봉효진은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뺨을 이리저리 갈기면서 연거푸 몇 대를 때리고 나서 비로소 멈추었다.
“나더러 때리라고 했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봉효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뺨을 여러 대 맞은 선우예슬은 수치심에 화가 났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아예 몸에서 힘을 뺀 채 까무러치면서 바닥에 쓰러진 척했다.
선우 댁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봉효진을 향해 쏘아붙였다.
“국공 저택의 아씨가 이렇게 무식하고 악랄하다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찌검까지해? 네 눈에 이 어미가 있기는 한 게냐?”
봉효진은 오히려 그녀를 비난했다.
“그럼 부인께서는 저를 딸로 생각하고 있사옵니까? 다른 건 둘째치고 이처럼 윤리 도덕이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 딸을 괴롭히는 어머니라니! 대체 어디가 어머니의 행세를 한다는 것이옵니까?”
한교영은 벌떡 일어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예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이 혼사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 강녕 제후 저택에는 너처럼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무례한 여자와 혼사를 치르는 복이 없구나. 나중에 사람을 보내 퇴혼서를 전해주지! 문석아, 가자.”
“그래. 혼인을 무르지!”
사실, 한문석은 그녀와 혼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만약 아버지의 명령만 없었더라면 그녀와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봉효진은 ‘기절’한 선우예슬이 눈을 번쩍 뜨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눈빛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만!”
이때, 봉효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