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피의 환생
“이 년아, 이젠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게냐? 셋째 아씨가 널 지켜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느냐?”
어디선가 냉정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 후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어린 소녀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봉효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등이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한동안 넋을 잃은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렸고, 그것은 바로 장 어멈의 목소리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그녀가 시집가기 전 머물렀던 국공 저택의 규방(閨房)이었다.
혹시 그녀가 살아 있는 건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악몽에 불과했을 까?
하지만 그것은 악몽이 아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지금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와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며 물건은 그녀가 마을에서 처음 국공 저택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와 똑같았다.
‘장 어멈? 해월이?’
장 어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셋째 아씨, 여자로서 이런 일을 피할 수는 없사옵니다. 아씨께서 죽느니 사느니 해도 전혀 좋은 점이 없사오니, 차라리 예슬 아씨를 받아들여 평화롭게 지내는 게 후궁에서 아씨의 지위를 단단히 굳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그녀의 말이 귀에 익은 봉효진이였다.
봉효진은 계모인 선우 댁이 살아계셨을 때, 선우예슬이 이미 한문석의 아이를 가졌기에 그녀에게 선우예슬을 집 안에 들여놓는 것을 허락하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 절대로 안 된다고 단정 짓자, 다시 깨어난 그녀를 향해 장 어멈은 이런 말로 설득했었다.
그녀의 눈빛은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었다.
‘설마 다시 태어난 건가? 시집가기 전으로 환생했다고?’
그녀는 주먹을 천천히 움켜쥐고 힘을 꽉 주었다. 전생의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가볍게 떨려오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해월을 바라보았다. 해월의 얼굴에는 손가락 자국이 몇 개 나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억울한 모습이 역력했다.
해월은 전생에 선우예슬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남몰래 그녀를 설득했었고, 선우예슬이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해서 그녀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앉으면서 덤덤한 눈빛으로 장 어멈의 얼굴을 훑었다.
“장 어멈의 뜻은 선우예슬을 첩으로 들이는 것을 허락하라는 게냐?”
장 어멈은 한껏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슬 아씨는 장군댁 출신으로 어찌하여 첩이 되겠사옵니까? 그녀를 평처로 받아들이면 셋째 아씨의 관대함도 보여줄 수 있사옵니다!”
“평처? 평처는 첩이 아니냐?”
봉효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 어멈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항상 깍듯한 태도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봉효진이었는데,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은 한껏 거들먹거리는 느낌이었다.
전생에서 봉효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들은 그녀를 마을로 보냈고,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녀가 돌아온 후 선우 댁은 장 어멈을 보내 집안일을 맡게 했다. 마을에서 자란 봉효진은 예절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대소사를 막론하고 전부 장 어멈이 결정했다. 결국, 이화원(梨花院)에서 이 늙은이의 권력은 아씨보다 더 컸고, 따라서 장 어멈은 점점 더 기고만장하게 변해갔다.
장 어멈이 말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 잖습니까. 평처와 첩은 다르옵니다. 소인의 뜻은 셋째 아씨께서 평처로 된다는 것이옵니다. 예슬 아씨께서 이미 아이를 가졌으니 당연히 정실 부인 자리를 먼저 차지하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이 점은 전생과 달렸다. 전생에서 선우 댁은 선우예슬을 평처로 맞이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들이 오래전부터 선우예슬을 정실부인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자코 있는 그녀를 본 장 어멈은 그녀가 타협한 줄 알고 말을 이어갔다.
“한 도련님과 예슬 아씨는 곧 도착할 것이옵니다. 게다가 봉 시랑의 부인님도 함께 찾아올 예정이오니 셋째 아씨께서는 어서 몸단장하고 손님을 맞이하시옵소서. 출정한 강녕 제후 나으리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이 일을 얼른 결정을 지어야 하옵니다.”
봉 시랑 부인, 즉 한문석의 누나는 전생에 그녀를 괴롭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다 그녀가 천적이라고 제일 처음 떠들어댄 사람도 그 여자였다.
그녀가 다시 태어나자마자 이 쓰레기 같은 남자와 악독한 여자를 곧바로 그녀 앞에 나타나게 하다니!
“얼른 아씨를 치장해주지 않고 뭐 하느냐! 넋을 잃고 가만히 서서 무엇을 하는 게냐? 아주 맞을 짓을 찾아서 하는구나!”
장 어멈은 해월을 향해 호되게 꾸짖었고, 손을 치켜들어 그녀를 때리려 했다.
봉효진은 장 어멈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장 어멈은 이곳에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 그만 나가거라.”
장 어멈은 그녀가 이런 말투로 자신에게 말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듯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한 번도 자신에게 대든 적이 없는 그녀였는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봉효진은 그녀를 놓아주었고, 경악하는 그녀의 눈빛을 애써 외면한 채 해월을 향해 말했다.
“이리 와서 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화장을 해주거라.”
해월이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씨께서는 장 어멈의 미움을 받는 게 두렵지도 않으신 건가? 장 어멈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은 마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아씨는 마님을 가장 두려워했는걸.’
방에 들어온 봉효진은 화장대 앞에 앉았고, 화장기 짙은 얼굴은 한껏 두드러진 채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이나 더 들어 보였다.
전생에 그녀는 마을에서 자라 배운 것도 없고 치장할 줄도 몰랐다. 오직 무술에만 심취해 있던 그녀가 국공 저택에 다시 돌아왔을 때 선우 댁은 장 어멈에게 그녀의 시중을 들게 했다. 장 어멈은 매일같이 그녀를 귀신처럼 덕지덕지 치장하고는 경중(京中)의 여자들은 이렇게 치장해야 한다고 했는데, 전생에는 이런 모습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미울 지경이었다.
“화장을 모두 지우고 밝은색 옷을 골라 오거라.”
봉효진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해월은 이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씨께서는 진작에 이런 현란한 옷을 피해야 했사옵니다. 보기만 해도 촌스럽지 않으시옵니까? 그리고 이런 화장법이라니, 시집도 안 간 규수가 이렇게 꾸미고 다니는 게 세상에 어디 있사옵니까.”
봉효진은 따뜻한 눈빛으로 야무진 손놀림으로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닦아내는 해월이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깨끗하고 순수한 그녀의 민얼굴이 나타났다.
“아씨, 너무 아름답사옵니다.”
해월은 구리거울 속에 비친 사람을 보며 감탄했다.
봉효진은 손을 뻗어 미간을 쓰다듬었고 그곳에 흉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생에 그녀는 한문석을 위해 칼을 막다가 미간에서부터 머리 왼쪽까지 피를 뚝뚝 흘렸었다.
비록 그녀는 목숨을 구했지만, 완쾌된 후 한문석은 흉터가 너무 보기 흉하다고 말했었다.
이런 미련한 사람,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녀는 직접 눈썹을 그리고 입술연지만 입에 발랐을 뿐, 아무런 색조 화장도 하지 않았다.
한창 예쁜 나이의 소녀는 굳이 꾸미지 않아도 아주 아름다웠다.
“아씨, 장 어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렵지 않으시옵니까?”
해월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끝내 질문했다.
봉효진은 무지 비단에 구름 문양이 수 놓인 넓은 소매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양 갈래로 높이 땋은 머리는 어깨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늘어져 있었다. 하얗고 흠잡을 데 없는 얼굴에 깔끔하게 그려진 눈썹은 약간 멋스럽게 느껴질 정도였고, 그녀의 자태는 선우예슬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녀의 미움을 사면 뭐 어떠냐.”
봉효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해월아, 잘 기억하거라. 너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니 내 말만 들으면 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개가 떠들어 댄다고 생각하거라.”
“아씨, 어찌하여 그렇게 험한 말을 할 수 있사옵니까.”
해월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이 드디어 반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지만, 서둘러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봉효진은 무심결에 미소를 지었고, 새하얀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생기가 감돌았다.
“나는 마을에서 자라 더 상스러운 말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대체 누구를 위해 규수인 척 했는가! 그녀는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자란 말괄량이였는데, 전생에 규수인 척하려고 얻어맞아도 반격하지 않았고, 욕을 들어도 되받아치지 못했으니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셋째 아씨, 봉 마님과 한 도련님이 도착했사옵니다. 마님께서 아씨를 들라 하여라 하셨사옵니다.”
장 어멈이 방 안으로 들어와 건방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봉효진은 장 어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해월을 데리고 나섰다.
장 어멈은 화가 난 나머지 넋을 잃고 말았다.
‘이 천한 년이 반항이라도 하는 건가? 얼른 마님한테 일러서 저년의 기를 누그러뜨려야지! 좋게 좋게 대했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마님과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면 큰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