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밥을 얻어먹는다
장 어멈에게 손찌검한 대가는 저녁에 밥을 못 먹는 것이었다.
해월이가 부엌에 가서 물었더니, 마님께서 이화원 모든 사람에게 저녁밥을 주지 말라고 했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이화당(梨花堂)에는 해월과 장 어멈을 제외하고 청소를 담당하는 3명의 계집종이 있었는데, 그들마저 쫄쫄 굶게 생겼다.
그들은 원래 장 어멈의 명을 따르던 사람이었고, 결국 봉효진 때문에 밥을 못 먹게 되니 분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해월은 걱정하는 어투로 봉효진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저녁밥이 없다 하더라도 내일마저 밥을 안 주면 어떡하옵니까?”
“일러바쳐!”
봉효진은 궤짝에 몸을 구겨 넣고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덜그럭 덜그럭거렸다.
“일러바치라고 하셨사옵니까? 국공 나으리께서는 남이 일러바치는 걸 싫어하옵니다.”
해월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드디어 궤짝에서 기어 나온 봉효진은 손에 회초리 하나를 쥔 채 말했다.
“드디어 찾았네.”
해월은 그녀의 손에 든 회초리를 보고 말했다.
“이건 청주에서 들고 온 회초리 아니옵니까? 마님께서 여자가 폭력을 행사하면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테니 안 된다고 하셔서 아씨께서 계속 궤짝에 넣어두고 계셨지 않으셨사옵니까?”
봉효진은 회초리를 허리춤에 꽂았다.
“해월아, 여자가 무력을 쓰지 않는 게 좋긴 하지만, 온갖 괴롭힘을 당하고도 무력으로 반항하지 않으면 그건 멍청한 것이다. 죽더라도 불쌍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없지.”
그녀는 전생에 그랬다.
“하오나.”
봉효진은 빙긋 웃으면서 회초리를 들었다.
“밥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을 쓸 필요가 없다.”
해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는지 가서 알아보거라.”
봉효진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한테 이르거라.”
“아씨, 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해월은 도통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서 가거라. 웬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게냐?”
봉효진은 자리에 앉아 회초리에 박힌 가시를 천천히 정리했다. 이는 그녀의 스승님이 선물해준 회초리로 손잡이 부분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의 제자 효진아!
전생에 그녀는 한씨 가문에 시집을 가고 나서야 스승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스승님을 탐탁지 않게 여긴 한문석은 그녀와 스승님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어리석게도 그의 말을 따라 스승님과의 연락을 끊어 스승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가 갓 혼례를 마치고 나서 아직 그녀의 태도를 꿈에도 모르는 스승님은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찾아왔지만, 그녀는 그를 대청마루에 내버려 둔 채 족히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나중에 한문석은 그에게 강녕 제후 저택은 그와 같은 사람과 왕래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당시 그녀는 밖에 숨어서 극도로 실망하는 스승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전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는 그녀는 차마 헤어나올 수 없었다.
반 시진 후, 해월이가 돌아왔다.
“아씨, 국공 나으리께서 돌아오셨사옵니다. 지금은 영명각(永明閣)에 계신다고 하옵니다.”
봉효진은 천천히 일어섰다.
“나를 따라 한번 가보자.”
“알겠사옵니다!”
해월은 비록 그녀가 가서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아씨라면 분명히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봉효진은 만약 아버지가 늦게 돌아오면 선우 댁이 매번 그를 위해 야식을 미리 챙겨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화원이 밥을 주지 않는 이상 그녀는 밥을 얻어먹으려는 심산이었다.
봉국공은 현재 감찰아문의 부 감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감찰아문은 예전에 반정문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탐관오리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최근 폐하께서 복주(福州)의 부패한 신하들과 결탁한 경중의 신하들을 색출해 내라는 어명을 내렸기에 봉국공은 매일같이 일찍 나가 늦게 돌아왔다.
비록 아문에서 식사를 챙겨주지만, 반찬이 변변치 않았다. 감찰아문은 솔선수범하여 반부패와 청렴을 실천하고자 제일 먼저 음식에서 조처를 했다.
선우 댁은 부군을 아끼는 마음에 그가 돌아와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항상 국물과 야식을 준비했고, 이에 익숙해진 봉국공도 매일같이 영명각에서 야식을 먹고 서재로 향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선우 댁은 그에게 다가가 겉옷을 벗겨주면서 시중을 드는 동시에 음식과 국을 대령하라고 명령했다.
“방금 집에 들어서자마자 초인이 문석과 봉 시랑의 부인이 왔다고 했거늘.”
봉국공은 자리에 앉아 옆에 있는 유자잎을 우려낸 물로 손을 씻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선우 댁은 그의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고 웃으면서 말했다.
“별일 아니옵니다. 저택을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옵니다.”
“그렇군!”
봉국공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이씨 할멈이 건네준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효진의 혼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제후 어르신이 돌아오기만 하면 혼인을 올릴 것이오. 그리고 승규의 혼사도 얼른 알아보시오. 오라버니로서 여동생한테 밀릴 수는 없잖소.”
이 말을 들은 선우 댁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국공 나으리께서 혹시 정국 제후에 대해 수소문해 본 적이 있사옵니까? 정국 제후의 따님인 노원 군주는 올해 막 시집갈 나이가 되었지요. 만약 이 혼사를 성사시킨다면 승규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사옵니다.”
봉국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꿈도 꾸지 마시오. 고작 승규의 인품과 행실로 노원 군주의 배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노원 군주는 황태후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인데, 우리 승규가 과연 황태후의 눈에 들겠소?”
선우 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노원 군주도 교활한 사람이라 하오니 굳이 그렇게 떠받들어 줄 필요가 없사옵니다. 게다가 우리 승규가 어디가 모자란 건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봉국공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 아들이 어디가 모자란 지 스스로 모르는 것이오? 헛된 생각은 하지 말고 형편이 비슷한 배필을 찾아보시오.”
이때, 하인이 음식을 들고 다가왔고,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그녀를 본 봉국공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소. 그만 얘기하시오.”
“네!”
선우 댁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봉국공이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자마자, 누군가가 잽싼 몸놀림으로 방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면서 아버지라고 부른 뒤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돌린 봉국공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효진이?’
“아버지.”
봉효진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지금 여기에 세 가지 반찬과 국이 있는데, 딸아이에게 좀 나눠주실 수 있사옵니까?”
선우 댁은 다급하게 말했다.
“효진아,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어 오라고 시킬 테니 이 음식들은 네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란다.”
봉효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사옵니다. 어차피 아버지께서 다 드시지 못할 것이옵니다.”
봉국공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선우 댁을 바라보았다. 비록 눈빛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어 이씨 할멈에게 수저와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씨 할멈은 어쩔 수 없이 수저와 그릇을 챙겨왔다.
식사하는 와중에 봉국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봉효진도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먹는 데만 집중했다. 그녀는 마치 굶주림에 허덕인 사람처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지만, 너무 과하지도 않았다. 세 가지 반찬을 정확히 반만 먹었고 나머지 반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봉국공은 젓가락질을 몇 번 하더니 이내 내려놓고는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식사를 마친 후 그는 무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오늘 저녁 배가 아주 고픈가 보구나. 저녁을 안 먹었느냐?”
봉효진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일어서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 어멈을 때렸더니 어머님께서 저한테 저녁을 먹지 말라고 명을 내렸사옵니다. 아마 당분간은 저녁밥이 없을 것 같은데 내일 저녁에 다시 오겠사옵니다.”
“잠깐만!”
봉국공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평소에 감히 자기한테 말조차 걸지 못하는 딸을 바라보았다.
“왜 장 어멈을 때렸느냐?”
봉효진은 싸늘하게 웃었다.
“왜냐하면 제가 한문석의 평처로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네가 왜 한문석의 평처가 되는 거냐?”
봉국공은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고, 당장이라도 화를 터뜨릴 기세였다.
선우 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둘러 대답했다.
“효진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 누가 너한테 문석의 평처로 되라고 했느냐? 예슬이가 평처고 너는 정실이란다.”
봉효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하오나 모든 사람은 오늘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사옵니다. 어머님께서 예슬이가 한문석의 아이를 가졌으니 저더러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제가 동의할 수 없다고 하니 다들 저를 냉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라며,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셨지요. 또한, 아버지께서 폐하의 총애를 받는 선우 장군을 급히 포섭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나중에 이화원에 돌아갔더니 장 어멈마저 제가 사리 분별을 못 한다고 했사옵니다. 제가 그들에게 손찌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설마 일개 하인인 어멈까지 건드릴 수 없사옵니까? 하오나, 결국 그건 저한테 허락된 일이 아니지요. 고작 어멈에게 손찌검했다고 적출인 국공 저택 아씨가 밥도 못 먹다니.”
봉국공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누가 너를 괴롭히면 아버지에게 말하거라.”
봉효진이 웃었다.
“필요 없사옵니다. 누가 저를 괴롭히면 제가 당한 만큼 돌려주면 되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고, 선우 댁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