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해의 소녀
“단서가 좀 잡혔어.”
남욱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건 참 잘된 일이네.”
그제야 임정이 다시 미소 지었다.
“네가 어떻게 그 여자애에게 보답할지 줄곧 궁금했거든. 난 네가 그 애랑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갈 줄은 몰랐지.”
임정의 뻔뻔한 농담에 남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남욱이 대답이 없자 임정은 따분한 표정을 짓다가 시선이 남욱의 휠체어에 닿더니, 두 눈을 빛냈다.
“그게… 남욱아, 너 다리 얘기는 제수씨에게 했어?”
재무 지표를 확인하던 남욱이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아니.”
그는 한참 지나서야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임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남욱아, 내가 잔소리하는 게 아니라, 네가 제수씨랑 무슨 목적으로 결혼을 했든, 이제 부부잖아. 평생 숨길 작정이야? 혹시라도….”
말을 마친 임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지금의 와이프를 받아들이려고 한번 시도는 해볼 수 있잖아. 너도 평생 그늘 속에서 살 수는 없잖아.”
그는 남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집안의 어르신 때문에 아내를 맞았다고는 하지만 정말 상대가 싫었다면, 결혼도 동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욱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는 빠르게 재무 지표를 확인한 뒤, 그제야 낮은 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예전 일이 그렇게 쉽게 잊어지겠냐.”
그 말에 임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욱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십 년 전 교통사고는 그들 모두의 악몽이었다. 모두가 그 사고에서 남욱이 양다리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날 사고에서 남욱이 잃은 것은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오윤희는 마침 트렁크를 챙겨 거실에 나온 왕 집사 부부와 마주쳤다.
“아주머니, 왕 집사님, 이게 무슨….”
“작은 사모님, 저희 아들이 내일 결혼식을 해서요.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봐야 해요.”
아주머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정말 축하드려요.”
오윤희는 진심 어린 축하를 전했다.
“며칠 동안 나가계실 거예요?”
“S시티에서 결혼식을 할 예정이라, 내일 저녁쯤 돌아올 거예요.”
부드럽게 미소 짓던 장씨 아주머니는 남욱을 보자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희가 다 집을 비우면 도련님 아침식사를 준비할 사람이 없네요.”
오윤희가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역시 부자는 부자였다.
‘아침 한 끼일 뿐인데 굳이 요리사라도 따로 불러야 하나?’
“괜찮아요.”
남욱의 목소리가 오윤희의 잡생각을 멈추게 했다.
“오윤희 씨, 요리할 줄 알죠?”
“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오윤희는 고개를 들어 남욱의 짙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 알죠.”
대답을 마친 오윤희는 오늘 아침 장씨 아주머니가 준비했던 풍성한 아침을 떠올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간단한 것만….”
남욱의 눈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할 줄 알면 됐어요.”
그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튿날 아침.
특별히 한 시간 전에 기상한 오윤희는 갖은 노력 끝에 드디어 제법 그럴싸한 아침 식사를 완성했다. 남욱을 부르러 주방을 나서는데 마침 남욱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왔다.
“건전지 있어요?”
오윤희는 잠시 멈칫했다가 남욱의 손에 든 전동 면도기를 발견했다. 면도기를 건네받은 오윤희가 물었다.
“단추 건전지가 필요하네요. 집에 없어요?”
“없어요.”
남욱의 얼굴을 보니 수염이 조금 자라나 있었다. 확실히 면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근처에 편의점이나 마트 없어요?”
“없어요.”
순간 오윤희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남욱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윤희는 부자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떡해요?”
그녀가 답답한 듯 물었다.
“비서님한테 부탁할까요?”
“이미 출발했을 거예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남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왕 집사님께 물어보니까 새로 산 면도기가 있다고 하셨는데, 전동이 아니라서 제가 사용방법을 잘 모르겠네요.”
멍하니 서 있던 오윤희는 그제야 남욱이 자신을 찾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 나한테 수염을 깎아 달라고 부탁하는 건가?’
“어디 있어요?”
오윤희는 불현듯 이런 남욱이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제가 할 줄 알아요. 도와드릴게요.”
“저기 서랍장에 있대요.”
잠시 후, 오윤희는 면도기를 찾아냈다. 거품을 발라서 사용해야 하는 가장 오래된 모델이었다. 오윤희는 꼼꼼히 남욱의 턱에 거품을 바른 뒤, 조심스럽게 면도를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지면서 오윤희의 숨결이 남욱의 볼에 닿았다. 남욱은 살짝 고개를 들고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하얀 바탕에 솜털이 보송한 그녀의 피부는 잘 익은 복숭아를 방불케 했다.
“왜 그래요?”
남욱의 시선을 눈치챈 오윤희가 더욱더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 아프게 한 건 아니죠?”
“아니요.”
남욱이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이러고 있으니까, 오윤희 씨가 진짜 제 아내가 된 것 같아서요.”
순간 흠칫한 오윤희는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명 정식 부부지만 남욱은 ‘같아서’라는 표현을 썼다. 그 말은 남욱도 자신처럼 이 결혼에 대해 아무런 현실감이 없다는 얘기였다.
“다 됐어요.”
오윤희는 빠르게 면도를 마무리하고 거품을 잘 닦은 뒤, 그를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이제 깨끗하네요.”
“고마워요.”
담담히 인사를 전한 남욱은 휠체어를 운전해 식탁으로 가서 식사를 시작했다. 아까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에 식탁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심지어 오윤희는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물어보는 것도 깜빡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여준이 별장에 도착했다. 남욱은 오늘 급한 일정이 있어서 먼저 출발하고, 오윤희는 콜택시를 불러 잡지사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하자, 어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사무실은 긴장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윤희는 곧장 소미를 불러 작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윤희 언니, 오늘 메일 못 받으셨어요?”
소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잡지사가 어제 인수당했잖아요! 관리층이 다 바뀌었어요!”
순간 오윤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타일 마인드가 비록 큰 잡지사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온 꽤 인지도가 높은 잡지사였다.
‘왜 갑자기 인수당한 거지?’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출입문 가까이에 앉은 직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왔다, 왔다! 새 편집장님이 오셨어!”
고개를 들자, 길고 다부진 몸매의 한 남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잡지사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오윤희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