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고생길 열린 김시우
피디는 두 남매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이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되레 내심 기분이 좋았다. 촬영이 시작한지 한 시간도 안 돼서 화제성이 생긴 것이다.
피디가 일부러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이 마을로 가는 유일한 길이거든요.”
“다른 방법 좀 생각해 보시면 안 되나요? 오토바이는 올라갈 수 있어요?”
김시우가 언짢은 듯 묻자 피디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구운이 두 남매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프로그램이 마을에서 녹화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입고 온 걸 이제 와서 누굴 탓해요?”
한구운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일부러 츄리닝에 운동화까지 신고 온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들 개인의 문제라는 말이다.
“여기 오기전에 미리 준비했어야지 이제 와서 환경을 불평하고 탓한다고 해봤자 뭐가 바뀌나요?”
여지없이 내뱉는 한구운의 독설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은 한구운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게스트들은 한구운이 역시나 소문대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소진과 임미현도 세 사람의 착장에 대해 어이가 없었다.
농촌 버라이어티 예능에 저렇게 차려 입고 나온 건 본인들 탓이 아닌가?
한구운의 말에 김시우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저희도 숙소가 산꼭대기에 있을 줄은 몰랐죠!”
그가 본 다른 예능에서 마을로 가는 길은 차가 지나갈 수 있게 넓고 평탄했다.
그리고 김서윤이 이런 모습으로 촬영하게 된 것도 둘째 형이 그녀가 시청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힌 것이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이렇게 무책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구운이 김시우의 말에 도발하듯 대꾸했다.
“제작진은 애초부터 저희한테 농촌에서 촬영할 거라고 얘기했어요. 두 사람은 산길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렇게 차려 입은 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두 사람이 연말 시상식에 참석한 줄 알겠어요.”
사람들은 한구운의 말에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참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가 없다!
김서윤은 한구운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독설을 날릴 줄은 몰랐기에 순식간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참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남자란 말이다. 하지만 한구운이 그녀에게 모질게 대할수록 그녀는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김서윤이 고집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괜찮아요. 전 걸을 수 있어요.”
한편,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윤혜성은 김시우의 점점 어두워지는 안색과 서러운 마음에 붉어진 김서윤의 눈시울을 보며 마음속으로 한구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때, 지켜보던 이세준이 분위기를 풀려고 입을 열었다.
“김서윤 씨도 산길이 이렇게 가파른 줄은 몰랐겠죠. 여자라면 다들 원피스와 높은 하이힐을 좋아하는 건 정상이니까요. 지금 다른 말보다 일단 두 여자 게스트분들이 어떻게 순조롭게 올라갈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게 우선인 거 같아요.”
윤혜성은 알 수 있었다. 이세준은 여자 게스트들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 김서윤을 위해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구운은 이세준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 대상님께서 얘기해 보세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맞나요?”
이세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김서윤이 감사의 눈빛을 보내자 그는 피디를 보며 말했다.
“오토바이를 몇 대 구할 수 없나요? 여기 여자 게스트들만 태워서 올려 보내게요.”
이세준은 김서윤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고 보여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모든 여자 게스트라고 강조한 것이다. 안 그러면 시청자들의 눈에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디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 산길이 유난히 가파롭고 좁아서 오토바이도 못 올라갑니다. 물론 일부 주민분들이 개인적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시기도 하지만 뒤에 사람을 태우면 사고가 날 가능성도 있기에 저희는 오토바이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기에 다들 어떡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실시간 댓글창에서 한구운과 김시우 그리고 김서윤 팬들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김시우 남매의 팬들은 한구운에게 예의가 없다고 욕하면서 요정한테 독설을 날리는 매너 없는 남자라고 호통을 쳤다.
이와 반대로 이세준에 대해서는 매너가 좋은 따스한 남자라고 칭찬했으며 한구운과 완벽하게 비교가 되었다.
한구운의 팬들도 가만있지 않고 반박했다. 분명히 농촌 버라이어티 예능인데 저렇게 차려 입은 김서윤이 너무 과하고 가식을 떤다는 평이 많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욕을 했다.
그들의 운느님이자 베이비운은 솔직하게 얘기했을 뿐 예의가 없다니? 잘못을 저질렀으면 겸손하게 지적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 누구의 팬도 아닌 네티즌들은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댓글을 보며 김서윤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디가 산길에 멈춰 서서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는 분 계신 가요? 김서윤 씨가 높은 힐을 신어서 목적지까지 걸어가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윤혜성이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해결하기 쉽죠!”
모든 사람이 윤혜성을 쳐다보자 윤혜성이 말을 이어갔다.
“김서윤 씨 캐리어에 편한 신발이 있을 거잖아요. 그 신발로 갈아 신으면 되죠. 물론 편한 신발이 없거나 굳이 계속 힐을 신고 싶다면 바꿔 신지 않아도 되고요. 정 걷기 힘들면 김서윤 씨가 잘 아는 분에게 산꼭대기까지 업어달라고 하면 되죠.”
말을 끝낸 윤혜성이 김시우를 힐끔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 뜻은 김서윤이 걷기 힘들면 여동생을 예뻐하는 오빠가 업어주면 된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고생은 김시우가 할 테니까. 김시우는 김서윤의 이미지를 위해 그 정도 희생은 할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한편, 윤혜성의 말에 김시우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혼자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김서윤까지 업기엔 무리였다.
김시우가 고개를 돌려 김서윤에게 물었다.
“서윤아, 너 걷기 편한 신발 챙겨왔어?”
김서윤은 속으로 오지랖을 떠는 윤혜성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그녀가 괜한 말을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김서윤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요정 이미지를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걷다가 ‘갑자기 캐리어에 편한 신발이 있다는 게 생각난 듯’ 자연스럽게 꺼내서 신었을 텐데…
이미지 만들기에 실패한 김서윤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
“아 참, 윤혜성 씨가 말하지 않았으면 제가 편한 신발을 챙겨왔다는 걸 깜빡할 뻔했네요.”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일을 까먹을 수 있다고?
한구운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연예계에 진출한 뒤로부터 앞뒤가 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봤다.
물론 그런 얍삽한 꿍꿍이로 그의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한구운은 못 본 척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김서윤에 대해서는 전혀 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 참석한 연회에서도 청순 가련한 척하며 그에게 꼬리를 쳤던 여자이다.
그를 그렇게 아무 여자한테나 마음이 흔들리는 쉬운 사람으로 본 건가?
그리고 이젠 농촌 버라이어티를 촬영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저렇게 차려 입은 것도 모자라 편한 신발을 챙겨왔다는 걸 깜빡했다는 거짓말까지 하다니.
저건 분명히 이미지를 만들려는 게 확실하다.
한구운은 앞으로 저 여자와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경계심을 높였다.
한구운의 싸늘한 태도에 김서윤은 더욱 서운했다.
어떻게 여자한테 저렇게 매정할 수가 있는 거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최선의 방법은 얼른 신발을 갈아 신는 거라는 걸 눈치챈 김서윤은 이내 그녀의 캐리어를 끌고 가는 스텝에게 다가갔다.
이때, 김시우가 그녀를 덥석 잡았다.
“내가 가져다줄게.”
안 그래도 가파른 산길인데 혹시라고 김서윤이 발목이라도 삐끗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윤혜성은 여동생에게 최선을 다하는 김시우의 모습을 보며 전혀 슬프지 않았다.
되레 김시우가 방송에서 그런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길 바랐다.
어째 됐든 아직까지 김서윤이 김시우의 친동생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모르니까. 나중에 김서윤과 그들의 관계가 폭로되면 욕을 먹는 건 더 이상 윤혜성이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잃고 지낸, 하마터면 깊은 산속에 팔려버릴 뻔한 친동생은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여동생에게 더 지극정성이라니.
더욱 중요한 건 이 남매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저렇게 친밀한 스킨십을 보며 다른 관계로 생각하지 않을까?
윤혜성은 전에 김 씨 가문에 있을 때부터 김서윤이 다섯 오빠들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습관적으로 다섯 오빠들과 스스럼없이 껴안는 등 과한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김서윤은 애교를 부리며 거실에 앉아있는 오빠들에게 안아서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기도 했다.
머리를 오빠들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대는 건 물론이고 주동적으로 그들과 손 깍지를 끼기도 했다.
첫째 오빠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집에 찾아오면 김서윤은 첫째 오빠에게 들이대기 바빴고 여자친구 대신 ‘여동생’인 그녀를 둘러싸게 만들었으며 이 남자는 내 남자라고 선전 포고라도 하는 듯했다.
그리고 둘째 오빠는 마음에 드는 여자 연예인에게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김서윤이 암암리에서 그 계획을 망쳐 놓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런저런 사실무근한 말로 그 여자 연예인을 싫어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이 프로그램은 라이브로 방송되기 때문에 김시우와 김서윤의 과도한 스킨십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남매 사이가 돈독하다고 칭찬을 받을수록 나중에 더 심각한 욕설을 받게 될 것이다.
정상적인 남매 사이는 절대 이렇지 않으니까.
윤혜성은 전에 그녀에게 어장관리 한다고 욕했던 사람들에게 누가 진정한 어장관리의 신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